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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5월호

THEME STORY
[THEME STORY] 칼럼 | 한국미의 대가 김덕용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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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용의 회화는 재료로 기억되기 쉽다. 나무와 자개, 안료와 재, 금박 같은 물성은 단번에 시선을 붙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을 오래 바라볼수록 끝내 남는 것은 재료의 희소성이나 표면의 화려함이 아니다. 작가가 붙들고 있는 것은 “한국미술이 어디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며, “한국미가 어떤 태도와 감각 속에서 국제화되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사회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와 예술철학 박사를 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과 성곡미술관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학예실장(1급 정학예사)를 맡고 있다.

 

김덕용, <차경-시간의 공간>, 2022, Mother of pearl and mixed media on wood, 240×180cm 

 

문인(文人)의 마음으로 다시 세우는 한국미
작가는 이 물음을 개념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손으로 더듬고, 몸으로 견디고, 시간을 쌓아 올리며 마침내 하나의 화면으로 응답한다. 그러므로 김덕용의 작업은 전통 재료를 활용한 동시대 회화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래된 감각이 오늘의 형식을 얻는 과정, 곧 시간의 축적과 기억의 침전, 노동의 밀도와 절제의 품격이 한자리에서 스스로 질서를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생지미(自生之美)란 바로 이 자리에서 성립한다. 외부에서 이식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의 기억과 전통의 감각, 물성의 결기와 정신의 호흡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밀어 올리며 스스로 생겨나는 아름다움 말이다.

작가에게 창작은 새로움을 조급하게 발명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것 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작가의 화면에는 단절의 과장보다 연속의 숨결이, 파격의 구호보다 삭힘의 힘이 더 깊게 스며 있다. 정교하지만 과시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떠들지 않으며, 깊지만 닫히지 않는 이 조용한 밀도. 김덕용의 회화는 바로 그 느린 품격 위에서 자기 미학을 획득한다. 

 

형사(形似) 너머, 마음의 필법
김덕용의 회화를 문인미학 안에서 읽는다는 것은 전통의 형식을 답습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인화의 기본 맥락, 곧 그림을 통해 한 인간의 심법과 격조, 삶을 대하는 태도와 내면의 호흡을 드러내려 했던 정신을 오늘에 맞게 되살리는 것이다. 

문인정신의 본질은 재료의 순수성이나 양식의 정통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물의 외형보다 그 안에 스민 뜻과 기운을 붙드는 마음, 기교보다 심법을 앞세우는 태도, 그리고 삶과 예술을 하나의 결로 이어 보려는 자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김덕용의 회화는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근본적으로 문인적이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그림을 형상만으로 논하면 아이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論畫以形似, 見與兒童鄰)”라고 했으며, 또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畫中有詩)”라고 강조했다. 문인미학의 오래된 명제를 압축한 두 문장은 오늘 김덕용의 작업 앞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작가의 화면은 형상을 버리지 않으나 형상에 갇히지 않고, 기억을 품되 서사로 닫히지 않으며, 사물과 풍경, 인물과 우주의 흔적을 드러내되 그것을 재현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래된 사진의 잔상처럼 떠오르는 장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형상, 달항아리와 바다, 별의 궤도와 우주산수는 모두 외형의 재현보다 내면의 울림을 앞세우는 문인적 시각의 현대적 변주다. 

작가가 “머리보다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말은 감상적 수사가 아니다. 회화를 계산된 구성의 결과가 아니라, 삶을 통과한 감각의 진실이 형식과 만나는 일로 본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의 화면에서 한국화와 서양화, 회화와 공예, 구상과 추상이라는 구획은 본질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본질은 오히려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읽고, 그 읽기의 깊이를 화면의 호흡으로 옮기는 데 있다. 김덕용이 문인화의 외형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문인정신의 현대적 계승자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붓과 먹의 문법을 답습하는 대신, 마음의 결을 나무의 결로, 시의 여운을 자개의 빛으로, 내면의 격조를 화면의 품격으로 바꾸어 놓는다.

김덕용, <우리들의 시간>, 2010, Dancheong on wood, 100×120cm (each) 

 

손의 시간, 적층의 호흡
김덕용의 작업을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빛보다 노동이다. 작가의 화면은 한 번의 제스처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무를 고르고 다듬는 시간, 표면을 만들고 덜어 내는 반복, 자개의 방향과 빛의 각도를 끝까지 살피는 집요함, 안료와 재, 금박의 층위를 조정하며 마침내 하나의 호흡을 얻어 내는 집중이 화면의 안쪽 깊숙이 스며 있다. 이때 노동은 형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형식이 스스로 생겨나는 조건이 된다. 자생지미가 자연발생적 낭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손이 견디며 쌓아 올린 시간 위에서 비로소 도달하는 생성의 상태로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회화는 적층지미(積層之美, 겹겹이 쌓인 아름다움)와 만난다. 적층은 단지 물질의 층위를 뜻하지 않는다. 나무의 결과 상처, 자개의 광택과 떨림, 시대를 통과한 기억의 잔향,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정서, 생명과 귀소에 대한 사유가 한 화면 안에 겹겹이 놓이는 방식 전체가 적층이다. 작가의 말대로 결은 과거의 시간이고, 빛은 미래의 시간이다. 이때 ‘빛과 결’은 단순한 조형 언어가 아니라 시간의 구조가 된다. 나뭇결은 지나 온 삶과 역사의 숨결을 품고, 자개의 빛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염원을 비춘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한 점의 표면 위에서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것, 바로 그 긴장과 공존이 김덕용의 화면을 두껍게 만든다.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가 말한 ‘은근과 끈기’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바로 이 대목에서 살아난다. 작가의 화면은 분명 정교하다. 그러나 그 정교함은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다. 표면은 반짝이되 번쩍이지 않고, 재료는 풍부하되 번잡하지 않으며, 노동은 깊되 허세를 드러내지 않는다. 치밀한 손의 개입은 끝내 자연스러운 한 호흡으로 가라앉고, 복합적인 물성은 오히려 담담한 울림으로 수렴된다. 이처럼 김덕용의 한국미는 전통의 외형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내면적 호흡을 오늘의 화면 안에서 다시 움직이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 

김덕용, <오션 랩소디>, 2020, Mother of pearl and mixed media on wood, 250×100cm(5pcs) 

 

한국미의 깊은 문법, 세계의 지평
김덕용의 작업에서 한국미는 민속적 표정이나 장식적 표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작가가 끝내 붙드는 것은 한국미를 이루는 내적 구조, 곧 자연스러움과 담백함, 고요함과 소박함, 그리고 서로 다른 것들이 다투지 않고 함께 머무는 조화의 질서다. 이 미감은 도상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을 조직하는 태도의 문제이며, 결과보다 호흡의 문제다. 많은 것이 놓여 있되 과잉되지 않고, 깊은 노동이 숨어 있되 무겁게 과시되지 않으며, 빛이 살아 있으되 소란스럽지 않은 화면의 숨결. 김덕용의 회화는 한국미를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리듬과 품격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다. 

이 지점에서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미학은 다시 한번 유효한 해석의 축이 된다. 최순우가 길어 올린 한국미의 심층은 화려함의 과장보다 은근한 지속, 인공의 과시보다 자연스러운 균형, 완결의 경직보다 생활의 온기와 절제를 더 중하게 여긴다. 김덕용의 화면이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의 작품은 분명 밀도 높게 구성되지만, 끝내 비어 있는 듯한 숨을 남기고, 정교하지만 도드라진 힘을 숨기며, 화려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담담한 평정으로 가라앉는다. 이는 전통 양식의 재현이 아니라, 한국미의 내면적 질서를 동시대 회화의 물성과 구조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제화의 문법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늘의 미술에서 국제성은 종종 지역성을 지운 보편 양식으로 오해되거나, 반대로 지역적 차이를 이국적 기호로 과장하는 방식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김덕용의 작업은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한국적 재료와 정신을 분명히 품고 있으나 그것을 표피적 정체성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과 기억, 생명과 순환, 귀소와 희망 같은 보다 깊은 감응의 층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다시 말해 그의 회화는 자기 고유성에 닻을 내릴수록 더 넓은 세계와 만나는 형식이다. 

이때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의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과 현대 미학 이론가 볼프강 벨슈(Wolfgang Welsch, 1946~)의 ‘초문화성(transculturality)’은 유효한 참조점이 된다. 서로 다른 전통과 감각은 평면적으로 섞일 때가 아니라, 자기 지평을 지닌 채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김덕용의 작업은 동서를 외형적으로 혼합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미의 심층을 스스로의 중심으로 삼은 채, 다른 지평과의 만남 속에서 더 넓은 해석 가능성을 여는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한다. 이것이야말로 주체 정신을 잃지 않는 동서 융합의 한 형식이며, 동시에 김덕용이 동시대 한국회화 안에서 갖는 미술사적 의의이기도 하다. 

작가는 한국화의 정신적 자산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료와 장르의 경계를 확장했고, 전통의 물성과 기억을 현재의 회화 문법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했다. 그 결과 그의 작업은 ‘현대적으로 변형된 전통’이라는 익숙한 범주를 넘어, 한국회화가 이후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빛과 결 사이, 오늘의 문인정신
김덕용의 회화는 오래된 것을 아름답게 배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전통 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오늘의 시간 속에서 다시 깨어나게 하는 시도이다. 여기서 문인정신은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태도의 계승으로 이어진다. 삶과 예술을 나누지 않는 마음, 기교보다 심법心法을 앞세우는 자세, 외형보다 기운을 중히 여기는 감각, 오래 바라본 끝에 얻게 되는 절제의 품격이 작가의 화면 전체를 관통한다. 작가의 노동은 그 정신을 물성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작가의 한국미는 그 물성이 마침내 고요한 질서로 정돈되는 순간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자생지미란 김덕용이 오랜 시간 화면 위에서 증명해 온 예술의 방식이다. 새것을 조급하게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에 쌓여 있던 시간과 기억, 전통과 감각이 스스로 형식을 얻도록 하는 일. 결은 지나온 시간을 품고, 빛은 오지 않은 시간을 연다. 그리고 작가의 회화는 그 두 시간이 만나는 현재의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자기 아름다움을 생성한다. 김덕용의 작업이 오늘 유효한 이유는 한국미의 과거를 보여 주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미가 지금도 살아 움직이며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 생겨날 수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 증언의 가장 단정하고도 깊은 형식이, 바로 김덕용이 오늘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문인의 회화다.

 

김덕용, <결-순환>, 2024, Mother of pearl and mixed media on wood, 220×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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