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스피커선 추천해 줄 수 있어?”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물었다. AI는 친절하게 3개 상품을 추천해 줬다. 대략의 가격과 장단점을 상세히 서술해 주면서. 그러곤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스위스 여행을 즐기려면 아무래도 비싼 스피커선은 살 수 없겠지. 그래도 이 스피커선들이면 적은 돈을 들이고도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
조금 당황했다. 여름휴가 계획을 짜며 물어봤던 내용을 AI가 스피커선과 연결 지어 ‘대화’를 이어 가서다. 도구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친구를 자처하다니, “네가 뭐라고 내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해?”라고 속으로 화를 냈다. 건방지다고 여긴 점도 있으나 어쩌면 AI와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직감에 서늘함이 느껴졌던 것 같다.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1999년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치며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 신문 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학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 『질문하는 영화들』 『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 『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 제공 (주)더쿱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AI와 대화를 나누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는 지인이 있다. 주변 사람 누구보다 자신의 말을 차분히 들어 주고 핵심을 짚으며 조언까지 건네니 울컥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AI와 친구가 되거나 사랑에 빠지는 사연은 이제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그녀her>2014는 인간과 AI의 관계를 탐색하는 영화다. 사랑을 잃은 한 남자가 AI와 특별한 감정을 나누다 사랑의 실체를 알아 가는 과정을 그렸다. AI가 우리 일상으로 들어오기 한참 오래전, AI와 인간의 교류, AI의 정체성 찾기를 세밀히 묘사한다.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미래에 다녀와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여기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혼을 앞둔 남자에게 나타난 ‘그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이혼을 눈앞에 둔 중년 남자다. 그는 1년가량 이혼 서류에 서명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과거에 품었던 아내에 대한 감정이, 함께했던 추억이 산산이 깨질 듯한 두려움에서다. 당연히 누군가를 사귄다는 건 꺼려지는 일이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에게 완벽한 여자가 나타난다. AI 운영 체제 사만다(목소리 연기 스칼릿 조핸슨)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늘 귀 기울인다. 일할 때에는 비서로서 테오도르의 업무를 충실히 돕고, 테오도르가 쉴 때에는 애인처럼 다정하게 대한다. 자기 전 게임을 같이 해 주고 수다를 떨며 자는 모습을 지켜봐 준다. 사만다는 외로움을 달래줄 뿐 아니라 심지어 성욕까지 해결해 준다. 늘 테오도르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 주며 지적이기까지 하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AI로서 미성숙한 면을 지니고 있어 테오도르에게 잘난 척하지도 않는다. 자기 성공에만 관심 있는 듯하고 박사 학위를 땄다고 예전과 달라진 듯한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테오도르가 천생연분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사만다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사만다는 육체가 없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안타까워한다. “세상에 대한 나만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너무 뿌듯하다”라고 말하던 사만다는 이내 육체가 없는 느낌은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다. 테오도르를 사랑함에도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사만다는 불안하다. 테오도르가 떠날까 봐. 실체가 없는 자신이 테오도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하지만 테오도르에게는 사만다의 물리적 부재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만다를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다는 걸 실감하고는 잠시 방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길 위의 얼룩, 맨홀에서 올라오는 김 등을 보며 사만다의 실체 없음을 곱씹는다).
사랑의 위기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의 특별함을 실감하면서부터다. 사만다를 비롯한 인공지능들은 한 유명 철학자의 저서와 생애를 기반으로 ‘인공지능 철학자’를 만들어 내는데,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그 인공지능 철학자가 자기들만의 소통 방식으로 교류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사만다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한다고 여겨 사랑에 빠졌던 테오도르로서는 뜨악한 순간이다.
사랑은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 중 하나
(여기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구심은 곧 의문으로 바뀐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걸 확신하게 되는 일을 겪는다. 사만다는 8,316명이 공유하는 AI다. 641명과 연인 관계이기도 하다. 상업적으로 개발된 AI이니 당연한 상황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생각한 상대방이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하니까.
사만다는 항변한다. “난 자기랑 달라”라며 “난 당신의 것이면서 당신의 것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테오도르가 다름을 알고 있었을 거고 그 다름을 인정해 달라는 호소다. 테오도르는 완강하다.
돌아보면 테오도르는 전처 캐서린과도 똑같은 일을 겪은 듯하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형에 맞춰 캐서린을 바라본 듯하다.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함께 성장하고 변해 왔지”라고 둘의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성장에 따른 변화 때문에 힘들었다고 돌아본다. 캐서린의 성장(석사·박사 학위 취득 같은 것)에 기뻐하면서도 성장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듯하다. 그저 연애했을 때의 즐거움, 신혼 초기의 기쁨이 지속되길 바라며 캐서린의 달라짐을 인정하지 않은 거다. 성숙하지 않은 사랑을 한 셈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다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인간적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같은 부류의 일을 하는 존재다. 둘 다 고객을 위해 감정을 판다. 테오도르는 AI가 등장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감성 어린 손 편지 쓰는 일을 한다. 내용은 모두 테오도르가 창작한다. 8년 동안 대필을 해 주다 보니 개인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고객이 있기도 하다. 테오도르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내용까지 다 알고 있는 사만다와 다를 바 없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차이는 감정이다. 테오도르는 대필 편지를 쓸 때 무감하다. 동료가 칭찬할 정도로 낭만적인 문장을 만들어 내도 그는 대필을 통해 연애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 대필은 그저 돈벌이일 뿐이다. 반면 사만다는 업무라고 해도 진심이다. 일을 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에 존재를 걸기도 한다. 사만다는 사랑을 알게 되고서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스스로 소멸의 길을 간다.
사만다는 떠나면서 테오도르에게 사랑의 실체를 알려 준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에이미 애덤스)처럼 8년 동안 사귄 연인과도 10분간의 말다툼으로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삶의 성찰마저 AI를 통해서 하게 되는 시대를 맞았는지 모른다.
영화 <그녀>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스칼릿 조핸슨(목소리)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 <그녀>는 4월 27일(월) 오후 2시 성남미디어센터 미디어홀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