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이 여행을 간다. 목적지는 튀르키예, 계절은 여름이다. 부녀의 해외여행은 예사로운 일이다. 여행지에선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기도 한다. 예약과 달리 객실 침대가 하나뿐이거나 호텔 공사로 소음이 좀 심하다는 정도가 유별난 일이라고 할까.
<애프터썬>(2023)은 큰 사건 사고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다. 부녀의 여행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화면에 전한다. 특별하지 않은 내용인 듯하나 보는 내내 마음이 출렁인다. 아빠와 딸이라는, 너무나 흔한 혈연관계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족 간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밀하게 포착해 낸다.
영화〈애프터썬>
열아홉 살 차이 아빠와 딸
아빠 캘럼(폴 메스컬)은 서른 살이고,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열한 살이다. 남들이 오빠와 여동생으로 오인할 정도로 나이 차가 적다. 소피는 엄마와 함께 영국 에든버러에 살고 있고, 캘럼은 런던에서 홀로 산다. 상세히 묘사되지 않으나 캘럼과 소피의 엄마는 결혼하지 않고 딸을 낳은 걸로 보인다. 오래 사랑을 속삭였던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고, 서로 사랑할 마음이 없었던 듯도 하다. 어쩌면 소피가 튀르키예 리조트에서 만난 10대 후반 오빠, 언니들처럼 휴양지에서 만나 불장난 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소피를 잉태했을지 모른다.
아빠와 딸은 자주 못 만난다.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여름에 단둘이서 여행을 가고는 한 듯하다. 소피가 다섯 살 때부터 함께 여행을 했다고 하니 부녀는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특별한 여름을 맞이한 셈이다.
자주 못 만나서일까, 아빠와 딸은 종종 어긋난다. 아빠는 딸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뭐든 말해 주고 싶고, 뭐든 가르쳐 주고 싶다. 어떤 때에는 딸을 성숙한 나이로 보고 또 어떤 때에는 딸을 어린이 취급한다. 딸에게는 아직 버거운 호신술을 가르치다가도, 딸에게 또래 어린이들과 놀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살짝 실망한다. 딸은 이성에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고전을 읽는 척하며 아빠 몰래 어른용 잡지를 본다. 오빠, 언니들처럼 불량하게 놀고 싶어 하고, 또래 남자애에게 연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소피는 아빠를 “이틀 후면 131살”이라고 놀리면서도 아빠가 지난해 휴가 때처럼 남들 앞에서 같이 노래 부르기를 원한다. 아빠는 “그럴 나이가 지났다”라며 딸에게 화를 내고 자리를 뜬다. 두 사람은 아빠와 딸로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소통에 애를 먹는다.
우울한 아빠, 날로 커 가는 딸
<애프터썬>은 성인이 된 소피의 회고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건 여행 기간 캠코더로 촬영한 영상물이다. 화면은 저화질이고 종종 흔들린다. 소통에 서툴지만 순수한 두 사람의 마음을 반영한 듯하다.
캠코더 영상 속 소피는 아빠에게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열한 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 캘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지나치다 싶어질 정도다. 아마 캘럼은 열한 살 때 지금 같은 삶을 상상도 못 했으리라.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는 우울함이 깃들어 있다.
영화는 캘럼의 직업도, 경제적 상황도 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분투하며 인생을 살아 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캘럼은 런던 주변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으며 소피와 함께 살고 싶다고 희망을 간략히 피력한다. 튀르키예까지 딸과 여행을 왔으나 캘럼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튀르키예 특산물인 카펫을 사려 할 때 주저한다. 리조트에 온 부잣집 청소년은 뭐든 무한대로 주문할 수 있는 플라스틱 팔찌를 차고 있으나 소피의 팔목에는 없다.
캘럼 역시 어른이 되기 전 누구나처럼 원대한 꿈을 꿨을 것이다. 스물 문턱에서 소피를 얻으면서 그의 인생 계획은 틀어졌을 것이다. 진학도, 취직도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캘럼은 양육비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소피는 캘럼 인생의 발목을 잡은 존재일지 모른다. 캘럼은 “네가 원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될 수 있고. 시간은 많으니까”라고 소피에게 말한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과 나이인 자기 모습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허리가 꺾이는 삶의 무게를 너무 일찍 접해서일까, 캘럼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듯하다. 그가 여행지에 가지고 온 책 두 권은 명상과 태극권에 대한 내용이다. 캘럼이 병난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 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난 표정으로 밤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고 돌아온 후 오열한다.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럼 같이 있는 거지”라는 소피의 기특한 말에 미소 짓기는커녕 눈을 감고 서글퍼한다. 캘럼이 열한 살 운운하며 질문을 던진 딸에게 바로 싸늘한 표정을 지은 건 아마 그의 마음에 어둠이 스며 있어서일 거다. 소피는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카펫으로 남은 아빠라는 추억
딸은 어른이 되고 아이를 가진 후 생일에 옛 캠코더 영상을 보며 20여 년 전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빠의 심정을 알게 됐고 그런 아빠를 꼭 안아 주고 싶으나 아빠는 이제 없다.
캘럼은 소피에게 말한다. “아빠한테는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서 어떤 파티에 가든지, 어떤 남자를 만나든, 약을 하더라도… 진심이야, 소피. 아빠도 다 해 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정작 캘럼은 소피에게 자신의 모든 걸 말하지 못한다. 아니, 할 수 없다. 아빠는 딸 인생의 무게를 덜어주고 싶지만, 자신이 짊어진 짐 일부라도 딸에게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캘럼이 쪽지에 남긴 말에는 이런 마음이 압축돼 담겨 있다. “소피, 이건 정말 잊지 마. 아빠는 너를 사랑해.”
캘럼은 소피에게 튀르키예에서 산 카펫을 남겼다. 소피는 성인이 된 후 자기 집 침대 아래에 그 카펫을 깔았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카펫을 밟을 때마다 소피는 아빠를 떠올릴 거다.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서 본 튀르키예 휴양 도시의 밤거리, 버스 안에서 아빠 품에 안겼던 순간, 비싼 수경을 잃어버리고 당황했던 모습, 아빠의 행동을 하나하나 따라 하며 함께 웃음을 터트렸던 때, 또래 남자애와 했던 첫 키스의 달콤한 기억까지, 옛 추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세상에 나온 날,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이에 대한 생각은 더 사무칠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함께하고 있지 않기에 더욱더.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1999년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치며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 신문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 『질문하는 영화들』 『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 『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 제공 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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