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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몰입형 콘텐츠의 시대: 도시를 삼키는 공감각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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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던 오랜 계약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수동적 관조의 시대를 지나, 신체와 감각 전체로 작품의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몰입(immersion)’의 시대로 진입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이 빚어낸 미학적 유행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깊은 문화적 갈증에 대한 응답이다. 관객은 더 이상 고정된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기만 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극의 일부가 되는 참여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환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렌즈는 바로 ‘공감각(synesthesia)’이다. 공감각이란 본래 하나의 감각 자극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지칭하지만, 이제는 예술가들이 기술을 통해 의도적으로 감각의 경계를 허물고 총체적 현실을 구축하는 핵심 전략이 되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감각적 몰입의 극한을 보여 주는 상징적 랜드마크다 © shutterstock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감각적 몰입의 극한을 보여 주는 상징적 랜드마크다 © shutterstock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현대인의 감각적 조건이 자리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이라는 평평하고 비물질적인 인터페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목적지 사이의 물리적 세계를 무의미하게 ‘건너뛰며(skip)’ 살아간다. 몰입 예술의 폭발적인 성장은 바로 이러한 스크린 중심의 삶이 야기한 감각적 박탈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의 일상적 상호 작용이 디지털 데이터로 파편화되고 빛나는 사각형 안에 갇힐수록, 인간의 지각 능력 전체를 동원하는 총체적이고 육화된 경험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입의 전략을 내세운 새로운 예술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바로 그 기술이 만들어 낸 감각의 공백을 채우며, 우리를 신체와 감각의 세계로 되돌리는 ‘재감각화(re-sensualization)’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몰입 위에 펼쳐진 새로운 감각의 생태계

몰입 경험의 최전선에는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기술의 힘으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곳에서 관객의 감각은 예술가가 설계한 법칙에 따라 재구성되며, 현실의 물리적 제약은 잠시 잊힌다. 일본의 팀랩 보더리스(teamLab Borderless)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는 이러한 감각의 요람을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두 사례일 것이다.

몰입형 콘텐츠의 대명사라고 불리며 살아 숨 쉬는 감각의 생태계라 칭할 수 있는 팀랩 보더리스는 ‘지도 없는 박물관’을 표방한다. 아트 컬렉티브 팀랩(teamLab)이 창조한 이 공간에서 작품들은 정해진 액자나 구획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비 떼는 이 방에서 날아올라 복도를 지나 다른 작품 속으로 사라지고, 폭포는 관객의 발밑에서 흘러내려 다른 공간의 꽃들을 피워 낸다. 이처럼 작품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객의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를 이룬다.

이곳의 철학은 ‘신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라는 개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몸으로 뛰고 움직이며 경험하는 ‘애슬레틱스 포레스트(Athletics Forest)’는 이러한 철학을 극적으로 구현한 창조적 운동 공간이다. 이는 단순히 눈으로 감상하는 예술을 넘어, 복잡한 3차원 공간 속에서 신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뇌의 해마를 성장시키고 공간 인식 능력을 기르도록 유도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예술 경험이다. 이곳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이 살아 있는 세계를 완성하는 필수적인 촉매제다. 즉, 관객의 상호 작용 없이는 작품이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관객은 이곳에서 방황하고, 탐색하며, 타인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팀랩이 창조한 공간 속 작품들은 서로 경계를 넘나들고, 관객의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변화하는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를 이룬다 © Aerial Climbing through a Flock of Colored Birds, Athletics Forest, teamLab, 2018-, Interactive Installation, Sound: teamLab

팀랩이 창조한 공간 속 작품들은 서로 경계를 넘나들고, 관객의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변화하는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를 이룬다 © Aerial Climbing through a Flock of Colored Birds, Athletics Forest, teamLab, 2018-, Interactive Installation, Sound: teamLab

 

라스베이거스의 스카이라인을 재정의한 스피어는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감각적 몰입의 극한을 보여 준다. 가히 당대 기술적 숭고함의 정점이라 칭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축구장 7개 넓이의 외부 LED 스크린 ‘엑소스피어(Exosphere)’가 도시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안, 내부에서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감각적 실험이 펼쳐진다. 18,600석의 객석을 감싸는 15,000㎡ 넓이의 16K×16K 해상도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지워 버린다.

청각 파트도 남다른데, 독일의 홀로플롯(HOLOPLOT)이 설계한 3D 오디오 시스템은 ‘빔포밍(beamforming)’과 ‘파면 합성(wave field synthesis)’ 기술을 통해 소리를 정밀하게 제어한다. 16만 개가 넘는 스피커는 특정 구역, 심지어 개별 좌석의 사운드 제어가 가능해 옆 사람과 완전히 다른 언어의 음향을 듣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개인화된 청각 경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 좌석의 진동을 통해 촉각을 자극하는 햅틱 기술과 바람, 향기와 같은 4D 효과가 더해지면서, 스피어는 관객의 모든 감각을 통제하고 재구성하는 ‘감각의 대성당’으로 완성된다. 이곳에서 관객은 이야기를 듣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 시공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팀랩 보더리스와 스피어, 두 공간이자 콘텐츠는 관객을 완벽한 몰입의 세계로 이끈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방식과 철학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팀랩 보더리스가 관객에게 탐험하고, 상호 작용하며, 자신만의 경험을 능동적으로 ‘끌어내도록(pull)’ 유도하는 생태계를 제공한다면, 스피어는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제어된 감각 데이터를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밀어 넣어(push)’ 전달하는 거대한 송신 장치에 가깝다. 팀랩 보더리스의 관객이 높은 자유도를 가진 ‘탐험가’라면, 스피어의 관객은 최상의 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는 ‘수신자’가 된다. 이는 몰입형 예술이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 즉 관객을 공동 창작자로 격상시키는 길과 감각 통제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길 사이의 핵심적인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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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스피어의 공식 개장과 함께 열린 록밴드 U2 콘서트 © U2 performs inside Sphere, 2023 ⓒ Stufish / Courtesy

 

도시와 자연으로 확장하는 공감각의 무대

한편 몰입의 무대는 이제 미술관과 공연장의 벽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도시의 건축물, 역사적 유산, 심지어 자연 환경까지 예술의 캔버스이자 무대가 되면서, 시민들의 일상 공간은 새로운 감각적 경험의 장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흐름은 기술이 도시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을 넘어, 도시가 품고 있는 고유한 역사며 생태와 깊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미디어 아트 축제인 서울라이트(SEOUL LIGHT)의 진화는 도시 스케일의 몰입 경험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보여 준다. 초기 서울라이트가 자하 하디드(Dame Zaha Hadid)의 미래적인 건축물 DDP의 비정형 외벽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미디어 파사드에 집중했다면, 2025년 여름 시즌의 서울라이트는 DDP를 둘러싼 공원 전체와 서울 권역으로 무대를 확장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새로운 시도의 핵심은 ‘투과 가능한 무대(permeable stage)’의 창조다. 작품은 더 이상 DDP라는 단일 표면에 투사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역사적인 한양도성 성곽과 새롭게 조성된 수(水)공간,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레이저와 자욱한 안개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환경으로 변모했다. 관객은 고정된 위치에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소리로 채워진 공원을 거닐며 작품 ‘속’을 통과한다. 미래적인 빛의 파편이 수백 년 된 성곽의 돌 틈으로 스며들고, 물과 안개가 공간의 경계를 흐리는 경험 속에서 관객은 시공간이 융합되는 공감각적 산책을 하게 된다.

또한 공감각적 무대의 급진적인 형태를 2025 성남페스티벌의 <시네 포레스트: 동화(動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분당 중앙공원의 울창한 숲 전체를 살아 숨 쉬는 하나의 거대한 야외극장으로 전환하는 최초의 시도다. 여기서 스크린은 인공적인 구조물이 아닌, 나무와 나뭇잎, 지형의 불규칙하고 유기적인 표면 그 자체다. 프로젝션 매핑 기술을 통해 빛이 나뭇잎 하나하나에 맺힐 때, 숲은 ‘꽃처럼 피어나는(動花)’ 거대한 생명체가 된다.

이 작품이 제안하는 ‘미디어 심포니’라는 새로운 형식은 공감각적 융합의 정점을 보여 준다. 70인조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 1,000명 시민 합창단의 목소리, AI와 작곡가가 협업해 만든 새로운 교향곡, 그리고 숲 자체가 만들어 내는 소리(바람 소리, 벌레 소리, 물소리)가 하나의 다층적인 사운드스케이프로 결합한다. 관객은 단순히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의 밤공기 속에서 시각과 청각과 환경적 감각이 완벽하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총체적 경험에 잠기게 된다. 총감독 이진준(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과 연출진이 목표로 하는 ‘확장된 공감(augmented empathy)’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는 도시 브랜딩을 위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던 초기 미디어 아트 축제의 목적을 넘어, 기술을 매개로 장소의 고유한 시학(poetics)을 발견하고 증강하려는 성숙한 예술적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의 미디어아트 축제인 서울라이트에서는 새로 조성된 수水공간에서 포그와 레이저로 이루어진 ‘RHYTHM IN FOG’를 선보인다 SEOULLIGHT, Rhythm in Fog, 2025 ⓒ 서울디자인재단

서울시의 미디어아트 축제인 서울라이트에서는 새로 조성된 수공간에서 포그와 레이저로 이루어진 ‘RHYTHM IN FOG’를 선보인다 SEOULLIGHT, Rhythm in Fog, 2025 ⓒ 서울디자인재단

경계 너머, 존재하는 예술

우리는 스피어의 기술적으로 완벽한 자궁과 팀랩의 살아 있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출발해, 서울라이트의 역사적 도시 구조와 <시네 포레스트: 동화>의 자연 세계로 확장되는 공감각의 무대까지 아우르는 여정을 마쳤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예술의 존재 방식과 그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유산에 대한 어떤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예술은 이제 전통적으로 추구했던 ‘재현(representation)’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 그 자체의 ‘표현(expression)’과 ‘형식(form)’에 집중했고, 이제는 관객이 직접 거주할 세계를 ‘구축(world-building)’하고 ‘시뮬레이션(simulation)’하는 방식으로 존재 양식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관객에게 남기는 것은 상징에 대한 지적 해석이 아닌, 몸에 깊이 새겨진 ‘육화된 기억(embodied memory)’이다. 발밑에서 느껴지던 모래의 감촉, 시야를 가득 채웠던 16K 해상도의 경이로움, 시뮬레이션된 위협이 안겨 준 서늘함, 숲속에서 울려 퍼지던 1,000명의 목소리가 만들어 낸 공동체적 울림… 이 기억들은 머리가 아닌 몸이 간직한다.

공감각적 무대의 궁극적인 지향은 예술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경험과 삶 자체의 경계를 허무는 데 있다. 이 몰입의 세계는 우리 안에 감각적 잔여물을 남겨 우리의 지각을 재조정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우리가 현실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풍요롭게 한다. 도시는 더 이상 단순한 건물의 집합이 아니며, 숲은 그저 나무들의 군집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마법과 기억이 깃들 수 있는 잠재적 캔버스가 되었다. 예술은 마침내 액자에서 탈출했고, 이제 진정으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곳에 존재한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디렉터

미디어 아트 및 디자인 분야의 연구자, 큐레이터, 교육자로서 국내 미디어 아트 활동의 순환 및 아카이빙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aliceon.co.kr) 편집장(2019), 게임 연구 집단 더플레이 대표, 한국디자인사학회의 학술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