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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의 예술가] 회화 작가 이만나 |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헤테로토피아를 그리다
이만나 작가는 사실을 그리면서 사실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드러낸다.
캔버스에 뿌려진 입자들이 공간의 울림을 만들고 그 공명의 틈새로 마침내 이면의 세계가 열린다.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열리는 2026 성남작가조명전Ⅰ <헤테로토피아: 신화가 된 회화>에 앞서, 그의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작업실을 찾았다.
글 김호경 객원기자 | 사진 최재우
2026 성남작가조명전의 첫 번째 작가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성남에서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성남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분당구가 처음 조성될 무렵입니다. 군복무 중에 부모님이 성남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휴가를 나올 때마다 동네를 탐색하고 다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성남에 터를 잡았고 작업실도 근방에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성남 안에서 작업실을 몇 차례 옮겨 다녔는데 현 작업실에는 7년째 머물고 있습니다.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는 것이 제 일상이고요, 보통 하루에 10~12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냅니다. 아침에는 날씨에 따라 클래식, 뉴에이지, 재즈, K-팝 등을 골라 듣고 낮에는 라디오를 틀어 둔 채 작업하기도 합니다.
다수의 평론가가 작가님을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예술가’라고 말합니다. 특히 ‘낯설게 하기’라는 장치를 통해 이 경계에 다가가시지요?
루마니아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저서 『성과 속』에서 역사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신화가 그 틈을 메우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그 ‘낯섦’의 순간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 문득 비일상이 솟아올라 긴장 상태를 만들어 내는 거죠.
사실 ‘낯설게 하기’는 일련의 과정이라기보다 순간의 감각에 가깝습니다. 저는 어떤 대상을 우연히 마주하는 찰나에 ‘낯섦’을 느낍니다. 과거에는 ‘낯섦’이 두려움에 가까웠어요. 노을을 보며 붉은색이 나를 덮쳐 오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은 두려움보다 ‘쿵’ 하고 내려앉는 울림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을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과 비슷하달까요. 물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낯섦’은 시공간이 정지하거나 비현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현기증을 동반하니까요. 저는 현실의 모퉁이에 선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면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요.
작업 초기에는 ‘낯설게 하기’라는 장치를 프레임 안의 대비로 구현했습니다. 일상적인 육교나 건물 위에 비일상적인 구름을 배치해 ‘낯섦’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었죠. 최근에는 ‘오래 그리기’라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을 왜 이렇게 오랜 시간, 정성 들여 그렸지?’라는 질문을 남김으로써 ‘낯섦’을 유도하는 거지요.
작가는 일상에서 만난 '낯섦'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고 작품의 소재로 활용한다
‘낯섦’을 느낀 사물이나 공간을 작품으로 옮기는 과정도 궁금합니다.
‘낯섦’의 순간은 우연히 찾아옵니다. 예측할 수 있다면 이미 낯설지 않겠죠. 그 순간을 항상 대비해 두지만,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에는 기억을 더듬어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사진을 찍어 둡니다. 사진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마주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어떤 형상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니까요. 이후 사진을 확대하거나 비틀어 보며 구도에 대한 고민을 하고 목탄으로 스케치를 합니다. 밑작업 역시 되도록 형상을 객관화해 현실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그림이 현실과 닮았다면 어떻게 비현실, 즉 ‘낯섦’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게 다가온 울림을 공유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진동’의 개념과 입자로 가득 찬 공간을 떠올렸어요. 물감을 희석해서 뿌리면 캔버스 위로 다양한 굵기의 방울이 맺힙니다. 그 입자 중 작품에 부합하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는 헝겊으로 닦아 냅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서로 다른 색의 방울들이 겹치며 ‘겹색’이 나타납니다. 다채로운 색이 진동하는 표면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 위에 붓질을 거듭하여 작업을 마무리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에는 켜켜이 쌓인 어두운 색감과 희소한 빛이 주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조형예술대학교 유학 시절의 경험이 색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요?
밤은 낮의 조명이 사라지고 무대 이면이 드러나는 생소한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화려한 색을 좋아한 적도 있습니다만 밤에 몰두하게 되면서 무채색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어요. 밤을 오로지 목탄으로만 그리기도 했고요. 그런 상태에서 떠난 독일 유학 시절, 어느 화창한 봄날에 교수님이 물으시더군요. “왜 이런 날씨에 시커먼 작업실에 틀어박혀 시커먼 그림만 그리고 있느냐”고요. 당시 저는 불투명한 앞날을 고민하며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 심정이 그림에 투영되었겠죠. 돌이켜 보면 그 질문이 밝은 색감에 대한 마음을 조금 열어 준 계기였던 것 같아요. 이후 어느 비 오는 밤, 산책길에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어요. 그 아래에 서서 올려다보니, 희미한 입자들이 수많은 빗방울과 뒤섞여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요. 그 느낌을 캔버스에서도 살리고 싶어서 밝은 색 물감을 흩뿌려 보았고요. 어쩌면 그 작업이 제 안에 있던 또 다른 감각을 끄집어내 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만나, <벽Ⅰ>, 2010, oil on canvas, 112×145.5cm
독일에서 ‘벽’을 주제로 쓴 작가 노트가 인상적입니다.
저는 그 시기를 면벽수행(面壁修行)에 임했던 때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벽’을 마주하며 수양했던 시간이었죠. 독일에서 ‘벽’은 문화적 차이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해와 화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독일의 벽들은 대개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여러 주인을 거치며 색이 덧입혀지고, 낡은 곳이 보수되거나, 창문이 생기고 사라지는 등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킵니다. 독일 사람들의 고지식한 태도에 마치 벽을 만난 듯 답답함을 느끼다가도, 100년이 넘은 벽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누그러졌어요. 그들의 토양 위에 견고하게 쌓인 시간이 그 완고함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또 벽은 막혀 있지만 동시에 그 이면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쌓고 또 쌓아 올리면서 나는 그 벽을 허물려 한다.’
최근작에서는 벽을 타고 자라는 ‘담쟁이’가 두드러집니다.
담쟁이는 그 자체로 굉장히 회화적인 대상입니다. 벽이라는 평면 위에 식물이 선을 그린 듯, 부피를 더해 가는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죠. 표면적으로는 깊이가 없지만, 그 너머에 생동하는 깊이를 품고 있는 점도 그렇고요. 담쟁이를 보고 있으면 일단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겨울이면 잎이 전부 떨어졌다가 봄이 오면 다시 벽을 온통 뒤덮잖아요.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고, 자기가 뭘 하는지 알긴 할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담쟁이의 생명력에 대한 일종의 경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태곳적 자연의 영역이니까요.
종종 담쟁이에서 제 모습이 드러나 보이기도 합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하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작업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오래 그리기’ 역시 정해진 답이 없는, 어쩌면 부질없는 행위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시간을 들여야만 비로소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작가님의 작품과 작가 노트를 보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떠오릅니다.
알베르 카뮈를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와 비교해 보자면, 카프카가 초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반면, 카뮈는 철저히 현실 안에서 저항을 이야기합니다. 현실 안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감정을 직시하라고 강조하죠. 특히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대해 서술한 대목은 제가 ‘낯섦’이라 정의해 온 감각과 매우 비슷합니다.
(생소함이란) 즉 세계가 조밀한 것이라고 깨닫는 것, 하나의 돌이 얼마만큼 낯설고 우리에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인가를, 그리고 자연과 하나의 풍경이 어떤 강도를 가지고 우리를 부정할 수 있는가를 엿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 단 하나의 사실, 즉 세계의 조밀함과 생소함, 그것이 부조리인 것이다.
작가님과 대화할수록 ‘스스로 치밀해지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을 ‘천성’이라 표현하셨는데요, 그 천성을 받아들이고 자기 확신을 얻기까지 어떤 노력을 해 오셨나요?
독일 유학을 시작했을 때 제 나이가 서른다섯이었습니다. 회화 작업을 지속하면서도 빠르게 변하는 주변의 흐름 탓에 고민이 깊던 시기였죠. 하지만 막상 독일에 가 보니 유행이랄 게 없더군요. 누가 어떤 옷을 입든,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세계에 몰두해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며 이전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잊었습니다. 한국에서 느꼈던 경쟁과 견제를 덜어 내니 오히려 제 작업에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 수 있었죠.
독일에서 마주한 거장들의 작품 또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회화의 평면성에 한계를 느끼며 회화의 해체나 입체로 확장하는 설치 작업을 고민했지만, 정작 거장들의 회화 앞에서는 그 어떤 장치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평면적인 그림일 뿐인데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몰입감이 압도적이었어요. 그때 비로소 ‘이것이 회화의 힘’임을 실감했습니다. 평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서히 몸에 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만나, <길가>, 2025 oil on canvas, 130.3×194cm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입니다. 작가님의 작품 <먼 봄>(2019)이 떠오르는데요, “내게 봄은 항상 아득하게 느껴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예전 중원구 여수동에 작업실이 있던 시절, 북향에 가건물처럼 새시로 이루어진 공간이라 겨울이면 실내인데도 살얼음이 낄 정도로 추웠어요. 내복을 껴입고 난로를 켜도 몸이 굳을 정도였죠. 담쟁이를 그리며 “겨울이 가기 전엔 마무리를 지어야지” 하고 되뇌었는데, 어느새 봄이 와 버렸어요. 몸은 여전히 움츠린 채였는데도 말이죠. 봄을 그려 보려 했지만 제 기억 속의 화사한 봄, 이상적인 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고요. 요즘은 꽃이 만개한 화사한 봄보다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뿌연 봄이 더 익숙하니까요.
이번 전시 <헤테로토피아: 신화가 된 회화>가 봄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누리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가 만든 개념이에요.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세계를 일컫는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에 실재하는 이질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독일에서 연 졸업 전시의 제목이 <헤테로토피아>였지요.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처럼 보일지라도, 예술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을 담아 보려 합니다. 비교적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두루 볼 수 있는 전시인 만큼, 시간이 흐르며 붓질과 색감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 간극을 느껴 보셔도 좋겠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나를 붙잡는 작품 앞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 머물러 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올해에는 어떤 일상과 비일상을 살아갈 계획이신가요?
아마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 되겠지요. 집과 작업실을 오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전시와 인터뷰에 참여하면서요. 몇몇 작품은 홍콩과 시카고에서 선보일 예정이기도 합니다. 다만 비일상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약속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다 불현듯 나타날 것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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