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 옷을 입으셨네 - 홍난파 작곡 ‘봄처녀’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 윤용하 작곡 ‘보리밭’
따로 시간을 내어 익힌 적은 없지만, 한국 가곡은 가사만 보아도 자연스레 그 선율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1970~80년대 방송을 통해 우리 가곡을 대중가요만큼이나 많이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 더 젊은 세대에겐 학창 시절 떨리는 목소리로 수행평가를 치렀던 기억 때문일지 모르죠. 무엇보다 우리네 삶의 한과 정, 해학이 담긴 가사의 말맛에서는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K-컬처’의 짙은 전통이 배어 나옵니다.
글 허서현 월간 <객석> 기자 | 일러스트 박양수
우리말 노래의 전성기
최초의 한국 가곡으로는 보통 1920년대에 작곡된 홍난파의 ‘봉선화’를 꼽습니다. 당시 찬송가나 외국 민요 등 기존 서양 음악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르던 것과는 달리, ‘봉선화’는 우리 시에 직접 선율을 붙였다는 점에서 ‘한국 가곡’의 정체성을 확립한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본래 ‘가곡’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독일의 리트, 이탈리아의 칸초네, 프랑스의 샹송 등 모국어 시에 선율을 붙여 여러 형태로 발전해 온 장르입니다. 한국 가곡의 역사는 서양 음악 도입 후를 기점으로 삼기 때문에 이들에 비해 길지 않은 편이지만, 우리만의 음악으로 자리 잡기 위해 부지런히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홍난파를 비롯해 박태준의 ‘동무 생각’, 현제명의 ‘산들바람’, 김동진의 ‘봄이 오면’, 조두남의 ‘새타령’, 나운영의 ‘박쥐’ 등이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발표됐고,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겪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도 윤용하의 ‘보리밭’, 김동진의 ‘진달래꽃’, 변훈의 ‘명태’처럼 지금까지 애창되는 한국 가곡들이 탄생했죠. 1960년대는 교육이 활성화되며 가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로, 무조 음악의 작곡 기법을 적용한 백병동의 ‘빈약한 올페의 회상’과 같은 곡이 등장하는가 하면 이영조의 ‘엄마야 누나야’, 김규환의 ‘님이 오시는지’,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장일남의 ‘비목’, 신귀복의 ‘얼굴’ 등 대표작들이 잇달아 발표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차곡차곡 작품을 쌓아 오던 한국 가곡은 대외적으로 1970~8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81년부터 MBC에서 방영하기 시작한 ‘대학가곡제’는 당시 ‘대학가요제’에 필적할 만큼 높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김효근의 ‘눈’, 신동수의 ‘산아’ 같은 작품들이 이 무대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가곡을 부르는 클래식 음악 성악가의 모습이 자주 전파를 탔고 대중가수가 한국 가곡을 부르는 등, 장르 간의 경계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졌죠. 친숙한 한국 가곡, K-아트팝의 첫 번째 전성기였을까요. 외국 성악가들의 내한 공연 앙코르에 ‘그리운 금강산’이 단골로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Barbara Bonney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부른 한국 가곡 다섯 곡을 담은 음반Decca, 1998도 있었답니다. ‘대학가곡제’가 15회 만에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아쉽습니다. 조금 더 오래 이어졌던 MBC 창작동요제나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KBS 창작동요대회를 통해 아이들의 입에서 불릴 새로운 노래들이 꾸준히 탄생해 왔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세대 감성 정복기
주요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는 사라졌지만, 한국 가곡의 생명력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2003년 시작된 화천 비목 콩쿠르, 2009년 시작된 세일 한국 가곡 콩쿠르가 그 산실의 역할을 해 주었죠. 이주원‧김주원‧윤학준 등 요즘 세대 한국 가곡 작곡가들 역시 이 무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가사는 한층 친숙해졌고, 음악은 다양화와 대중화의 경계 없이 여러 갈래로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 언어로 만든 노래는 꾸준히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았고, 몇몇 결정적 우연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추모의 마음을 담아 불린 김효근의 ‘내 영혼 바람 되어’나 JTBC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2>를 통해 다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은 윤학준의 ‘마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놀라운 실력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 역시 곳곳에서 ‘내 언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고요.
무엇보다 한국 가곡만이 품고 있는 특유의 정서는 세대를 넘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요즘 세대에겐 ‘잃어 본 적도, 떠나 본 적도 없는 고국이 그리워지는’ 독특한 향수를 자극한다고 할까요. 발매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대중가요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역주행’하는 시대인 만큼, 앞으로 한국 가곡이 어떤 알고리즘을 만나게 될지도 기대해 볼 만합니다.
오늘날의 한국 가곡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한국 가곡에 ‘아트팝’이라는 이미지를 접목하며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작곡가 김효근이 2022년 선보인 뮤지컬 <첫사랑>은 그간 자신이 작곡한 한국 가곡을 활용해 장르의 범용성을 한층 확장한 사례입니다. 지난해 10월에는 KBS가 추석을 맞아 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인 성악가들이 참여한 이 경연은 한국어의 발음과 감정을 열정적으로 익히고 표현하는 이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담아냈죠. 상금은 무려 1억 원. 소프라노 조수미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대상은 ‘아리 아리랑’을 부른 스페인의 소프라노가 차지했습니다. 올해 3월에는 한국 성악가를 대상으로 한 의 방영도 예정되어 있는 만큼, 다가오는 봄에는 한국 가곡의 정서가 한 번 더 만개하길 기대해 봐도 좋겠습니다.
[추천 음반]
한국가곡집 제2집 골든애창곡 | Danal Entertainment, 1988
한국 가곡의 ‘근본’을 느끼고 싶다면 이 음반을 추천한다. 발매된 지 오래되었지만 익숙한 명곡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못 잊어 못 잊어 ‘쌩각’이 나겠지요’(하대응 작곡 ‘못 잊어’)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딕션이 담긴 노래부터,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 쐬주를 마실 때(크하!) /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변훈 작곡 ‘명태’)처럼 우리 전통 해학이 묻어나는 노래까지, 트랙마다 숨겨진 매력이 귀를 즐겁게 한다.
고성현: 시간에 기대어 | KSH ART, 2016
바리톤 고성현의 크로스오버 음반이다. 한국 가곡은 종종 ‘한국 사람이 불러도 가사가 잘 안 들린다’는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노래할 때의 발성이 일상적인 발음의 방식과 달라지기 때문인데, 이는 한국 가곡의 진입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고성현의 노래는 이러한 선입견을 깨 주는 훌륭한 선택이다. 한국어로 된 성악 발성의 노래가 익숙하지 않다면, 이 음반으로 한국 가곡이라는 장르에 한 발짝 다가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