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STORY] 칼럼 - 예술기술 융합의 현재와 미래 | 회색이 되지 않는 융합 - 협업의 기예에 관하여
전지 한 장이 벽에 붙어 있었다. 매트릭스(Matrix)가 그려진 종이 위에 열다섯 개의 화살표가 얽혀 있었고, 한 사람이 그 앞에 오래 서서 자기 화살표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다른 사람의 화살표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과 나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그날의 출발점이었다. 성남문화재단의 예술기술융합프로젝트 <업스케일링 성남>의 워크숍, 그 두 번째 자리에서였다.
글 장석류 국립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업스케일링 성남> 2기 워크숍 현장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단순하지 않았다. 매체가 달랐고, 기술을 다루는 태도가 달랐고, 작업이 시작된 자리도 달랐다. 그럼에도 그날 모인 열다섯 명의 의도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터랙티브. 지난해와 올해 <업스케일링 성남>에서 만난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은 매체와 장르가 달랐음에도 결국 같은 자리를 향해 있었다.
2001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광장에 펼쳐진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인터랙티브 작품
Rafael Lozano-Hemmer,
인터랙티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인터랙티브 예술이란 무엇인가. 매체학자 레프 마노비치는 일찍이 새로운 미디어의 본질을 ‘가변성(variability)’에서 찾았다. 작품은 한번 만들어져 고정되지 않고, 잠재적으로 무한히 다른 버전으로 존재한다. 인터랙티브 예술은 이 가변성을 자기 매체의 본질로 끌어안은 예술이다.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고, 관객의 움직임과 시선, 호흡을 만나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멕시코계 캐나다인 미디어 아티스트 라파엘 로자노-헤머가 2001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한 광장에 거대한 스크린을 세웠다. 작품의 이름은
. 사람들이 광장을 가로지르면 그 그림자가 스크린 위에 거대하게 비쳤고, 오직 그 그림자 안에서만 미리 촬영된 천여 명의 거리 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행인이 멈추면 초상이 머물렀고, 움직이면 초상도 따라 움직였다. 작품은 행인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로자노-헤머는 자신의 관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관객은 나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서로에게 주는 거지요.”
이 한 문장이 인터랙티브 예술의 진짜 자리를 짚어 준다. 작품의 수신자는 작가가 아니다. 옆에 선 다른 관객이다. 한국 작가 김아영의 작업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가 2022년 발표한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인공지능과 게임 엔진, 라이다 스캔으로 직조된 영상 작품이다. 이 작업으로 2023년 미디어 아트의 권위 있는 상으로 불리는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골든 니카를 받았고, 2025년에는 한국 작가 최초로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심사단은 그의 작업을 두고 “기술과 인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독창적 관점을 제시한다”라고 평했다. 김아영은 2016년부터 안무가, 음악가, 배우, 성우, 이론가들과 협업하면서 작업을 확장해 왔다. 첨단 기술이 그의 매체이지만, 그 매체가 가닿는 자리는 결국 인간이다.
성남에서 만난 작가들의 의도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일상의 사소한 제스처, 이를테면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는 동작을 감각의 트리거로 바꾸고자 했고, 누군가는 관객이 들어와 누울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작품으로 설계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술을 부른 자리는, 사람의 사소한 동작과 깊은 정서를 다시 만나게 하는 자리였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터랙티브가 의미를 갖는 자리는 한 곳뿐이다. 기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자리다.
인공지능과 게임 엔진, 라이다 스캔 등으로 제작한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한 장면
Ayoung Kim, , single-channel video, 25 min. 2022
예술과 기술의 만남, 그리고 산업의 예술화
예술과 기술의 만남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 만남의 출발점에 백남준이 있다. 1984년 새해 첫날, 그는 위성을 통해 뉴욕과 파리를 한 무대로 묶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당시 위성 방송망은 군사와 통신을 위해 깔린 산업 인프라였다. 백남준은 그 인프라를 끌어와 예술의 무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작업은 엔지니어들과의 협업의 산물이었다. 한국에서 예술과 기술의 만남은 백남준 이후 이어져 온 오래된 미래다.
다시 마노비치를 빌리자면, 그는 새로운 미디어의 또 하나의 원리를 트랜스코딩(transcoding)이라 불렀다. 컴퓨터의 논리가 문화 안으로 스며들고, 문화의 논리가 다시 컴퓨터의 언어로 환원되는 상호 변환의 흐름. 백남준의 시대에 이 흐름은 한 방향이었다. 예술가가 산업의 인프라를 끌어와 예술의 매체로 삼는 흐름. 그러나 지금, 흐름은 양방향이 되었다. 산업이 예술의 감각을 배우러 오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강이연 작가의 가 그 한 예다. 두바이에서 열린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자리에서 그는 구글, 나사(NASA)와 협업한 인터랙티브 작품을 선보였다. 나사가 독점 제공한 위성 데이터가 작품의 재료였고, 관객은 빗물 모으기와 해수 담수화를 게임 형식으로 직접 체험했다. 작가가 산업·과학 기관의 데이터를 끌어와 작품의 매체로 삼는 자리. 백남준이 했던 일이 동시대에 다시, 그러나 더 깊게 일어나고 있다.
이 흐름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술가가 다루어 온 인터랙티브의 언어, 곧 관객의 반응을 읽고, 감각을 확장하고, 공간을 다감각적 환경으로 설계하는 일이 더 이상 예술계 내부의 자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차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공간의 분위기 설계, 가전제품의 촉각적 반응, 도시의 야간 경관. 이 모든 자리에서 예술가가 다루어 온 감각의 문법이 산업의 핵심 자원이 되어 가고 있다. 산업의 예술화. 이것이 지금의 흐름이다.
성남 워크숍에서 만난 작가들의 작업은 이 흐름 위에서 다양한 기술적 모서리로 분화되어 있었다. 어떤 작가는 코드와 알고리즘으로 시스템을 직조했고, 어떤 작가는 모터와 센서를 직접 조립해 물성에 움직임을 부여했으며, 또 다른 작가는 공간 전체를 캔버스 삼아 관객의 동선을 설계하고 있었다. 같은 인터랙티브를 향하면서도, 끌어 쓰는 기술의 결은 모두 달랐다. 재료로서의 기술과 도구로서의 기술, 디지털과 물리 세계 사이의 왕복은 동시대 예술가에게 이미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은 이 왕복의 속도를 올린다. 동시에 새로운 협업의 짝을 추가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협업에 더해, 인간과 기계 사이의 협업. 흐름은 더 빨라지고, 다루어야 할 매체는 더 다양해지고, 한 사람이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협업이다.
협력과 협업의 기예
한국의 예술기술 융합 사업이 자주 반복하는 패턴이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알아서 협업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협력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저서 『좋은 조직문화란 무엇인가』를 쓰면서 부산 영도 문화도시센터의 한 크루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한 말이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일하지?’ 싶었는데, 그 이유를 이해하면서 갈등까지 풀리는 경험을 했어요.” 협업은 그 의문이 풀리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매칭의 순간에 시작되지 않는다.
함께 일한다는 것의 본뜻을 한자(漢字)에서 다시 묻고 싶다. 협(協)이라는 글자에는 하나의 구심점을 뜻하는 열 십(十)과 여러 힘을 뜻하는 힘 력(力) 셋이 함께 놓여 있다. 즉 협(協)이란 서로 다른 여럿의 힘이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정렬되는 구조다. 구심점 없는 모임은 단순한 집합에 그치고, 다양성 없는 모임은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하다. 협력(協力)이 각자의 힘을 보태는 단계라면, 협업(協業)은 서로의 전문성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단계다. 협력 없이 협업은 없다.
영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책 『Together』(2012)는 한 권 전체가 이 명제로 짜여 있다. 협력은 좋은 마음이나 공유된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이 필요한 기예(craft)이다. 그가 보기에 협력은 듣고, 응답하고, 다시 듣는 반복적 훈련을 통해 몸에 새겨지는 기술이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협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의 진단은 한국의 예술기술 융합 현장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 기예는 누가, 어떻게 성장시키는가.
성남 워크숍에서 우리가 시도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첫 번째 자리에서는 열다섯 명의 작가가 자기 작업의 좌표를 같은 매트릭스 위에 표시했다. 매체의 형태와 기술을 대하는 태도라는 두 축이 만드는 사분면. 이름과 작품 제목 대신 좌표가 먼저 깔리자, 서로 다른 분야의 작가들이 처음으로 같은 언어로 자기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자리에서는 그 좌표 위에 벡터를 그었다.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싶은가를 묻고, 정반대 방향에 화살표를 그은 사람을 찾는 대척점 매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결핍은 부끄러운 빈칸이 아니라, 동료의 강점과 결합할 완벽한 소켓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 도구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일하던 사람들이 같은 언어로 자기를 말하게 만드는 단계적 장치였다.
이런 협업의 양식이 한국에서 작동한 사례가 이미 있다. 작가 권병준은 1990년대 싱어송라이터로 시작해 네덜란드의 전자악기 연구개발 기관 STEIM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작업은, 음악과 연극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의 핵심 매체인 소리를 다른 분야 사람들과의 협업으로 직조한다. 2020년 결성된 ‘디지털 사일런스’는 뉴미디어 작가, 전파공학자, 시각예술 이론가가 함께 일하는 장기 협업 컨소시엄이다. 일본의 팀랩이 자기 그룹을 울트라테크놀로지스트라 부르며 작가·프로그래머·엔지니어·수학자·건축가가 한 작품의 공저자가 되는 양식을 표준으로 만들었다면, 한국에서도 같은 양식이 작가 한 명의 작업에서, 또 장기 컨소시엄의 형식으로 자라나고 있다. 협업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학습되고 설계되는 기예다.
행정이 답해야 할 다음 질문
예술기술 융합이 시대의 흐름이라면, 그 흐름을 받아 내는 행정의 자리도 새로 그려져야 한다. 산업이 예술의 감각을 배우러 오는 시대에 예술기술 융합 지원사업은 더 이상 예술계 내부의 작은 실험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감각의 시대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함께 키워야 할 자원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어떤 질문에 답해야 하는가. 세 가지 전환을 떠올린다.
첫째, 결과물 중심에서 협업 매칭의 깊이로 평가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협업이 기예라면, 평가의 자리는 그 기예가 얼마나 깊이 학습되었는지를 묻는 자리로 옮겨 가야 한다. 누가 누구를 만났고, 그 만남이 어떤 새로운 가치를 길어 올렸는지를 물어야 한다. 둘째, 한 명의 육각형 인재에서 서로 다른 모서리들의 별자리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춘 한 사람보다, 자기 모서리를 분명히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결핍을 소켓으로 받아 주는 별자리를 키워야 한다. 셋째, 작품 완성도에서 피어러닝의 두께를 살펴야 한다. 한 작품의 완성도만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동료가 서로에게서 배웠는가다. 결과는 한 번이지만, 학습은 다음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 세 전환은 한 가지 원리의 변주다. 결과를 서두르지 말고 과정에 투자하라.
여기에 한 가지 경계의 지점을 더해야 한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클레어 비숍은 참여(participation)와 협업(collaboration)을 구분하면서, 참여자는 작가가 정한 매개변수를 따르지만 협업자는 저작권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숍은 일찍이 경고했다. “참여는 이미 스펙터클과 합쳐졌다.” 인터랙티브 예술이 자칫 거대 체험형 콘텐츠로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의 예술기술 융합 지원사업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자원이 가야 할 자리는 작가-관객 인터랙티브의 외형보다 창작자-창작자 협업의 내실이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빠르게 키우는 길보다, 협업의 기예를 천천히 학습할 자리를 만드는 일이 먼저다.
성남문화재단이 <업스케일링 성남>에서 <아트×테크 창작 랩>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변화가 보인다. 결과물보다 관계의 두께에 먼저 투자하는 흐름이다. 작가들이 서로를 알아 가고, 자기 좌표를 다른 사람의 좌표 옆에 놓아 보고, 결핍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소켓으로 다시 읽는 자리. 이런 시도가 한국의 다른 지역과 기관으로 번질 수 있다면, 한국 예술기술 융합의 지형도가 한 단계 다르게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행정이 답해야 할 다음 질문은 한 가지다. 우리는 별자리를 키우는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점들을 모아 놓고 그것이 그림이 되기를 기다리는 자리에 서 있는가.
회색이 되지 않는 융합. 이 한 줄에서 시작했다. 흑과 백이 섞여 회색이 되는 자리에서는 좋은 융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흑은 흑대로, 백은 백대로 자기 결을 지킨 채 한 접시 위에서 극적인 대비와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융합이다. 예술가는 자기 작업의 한 점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의 방향을 가진 사람이다. 융합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들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기술이 아무리 빨라져도,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협업은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기예이며, 좋은 마음만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학습되고 설계되어야 하는 솜씨다. 우리가 함께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면, 그 학습의 자리를 먼저 만드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