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오페라 산책] 알고 보면 쉬운 오페라 이야기 - 셰익스피어와 오페라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천재적인 언어 감각, 강렬한 연극성, 전 유럽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배경’의 희곡 작품들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극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총 38편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이들 작품 속에는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 탁월한 묘사력과 촌철살인의 풍자, 압도적인 스토리와 심오한 주제 의식이 넘쳐흐른다. 사후 41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음악, 발레, 연극, 영화 등으로, 심지어는 만화와 게임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그 압도적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글 황지원 오페라 평론가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16/17 시즌 공연 사진 ⓒKen Howard/Metropolitan Opera
사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오페라계였다.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아름다운 음악만큼이나 이야기의 힘과 문학적인 감동이 특별히 중요하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탐독했으며, 그의 작품이 지닌 수려한 언어 감각과 극적인 스토리들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선율들과 만나 인류 문화의 보석과도 같은 명작 오페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여기 오페라로 만들어진 최고의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소개한다.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16/17 시즌 공연 사진 ⓒKen Howard/Metropolitan Opera
프랑스 서정에 물든 비극적 사랑 이야기
샤를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Roméo et Juliette)>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원수 집안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워낙에 인기 있는 작품이라 수많은 작곡가가 오페라화를 시도했지만, 그중에서도 샤를 구노의 작품이 단연 첫손에 꼽힌다.
프랑스 오페라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극적이고 정열적이기보다는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정밀한 로맨티시즘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노 역시 작품의 얼개와 구성은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가져가면서도, 프랑스 작곡가 특유의 시적인 관현악법과 정밀한 감수성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1막 무도회 장면에서 줄리엣이 부르는 소프라노 아리아 ‘꿈속에서 살고 싶어라 Je veux vivre’와 2막 로미오의 테너 아리아 ‘태양이여 떠올라라 Ah! lève-toi, soleil’ 등은 최고의 명곡으로, 지금도 콘서트홀에서 단독으로 공연되는 경우도 많다. 원작과 다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기 직전 단 몇 분간 재회하는 장면도 있어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한편,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빈첸초 벨리니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아니라 이탈리아 현지의 원전 설화에 기반한 <카풀레티와 몬테키(I Capuleti e i Montecchi)>를 발표했다. 여기서는 로미오 역을 메조소프라노에게 맡겨 보다 음영이 뚜렷한 이탈리아식 비극의 정점을 보여 준다.
오페라 <맥베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14/15 시즌 공연 사진 ⓒMarty Sohl/Metropolitan Opera
무대를 압도하는 권력과 욕망의 비극
주세페 베르디, <맥베스(Macbeth)>
‘이탈리아 오페라의 왕’이라 불리는 주세페 베르디는 실로 셰익스피어를 사랑한 작곡가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실러를 원작으로 한 <루이자 밀러> <돈 카를로>와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음악을 붙인 <에르나니> <리골레토> 등도 썼지만, 평생 존경하고 가장 큰 애정을 쏟은 작가는 역시 셰익스피어였다. 특히 <맥베스>는 베르디가 셰익스피어를 원작 삼아 쓴 첫 번째 오페라로, 30대 작곡가 특유의 불같은 열정이 넘쳐흐르는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맥베스>는 오페라화가 불가능한 희곡으로 생각되었다. 당시 오페라 무대의 필수 요소였던 ‘러브라인’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디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 대신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 ‘인간의 탐욕과 나약함이 불러오는 죄의식 등 셰익스피어가 강조한 심오한 주제 의식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주인공에 대한 어둡고 심오한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찬탈한 맥베스가 느끼는 불안감, 타오르는 욕망으로 가득 찼으나 결국은 망령에 시달리며 생명력을 잠식당하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 등이 30대의 베르디가 써 내려간 뜨거운 숨결의 관현악을 통해 너무나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심지어 베르디는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이중창 장면에서 ‘너무 예쁘게는 부르지 마라’라는 특별 지시까지 내렸다. 그저 아름답고 우아하게만 노래하던 오페라 무대 전통에 반기를 들고 우리 인간이 지닌 공포와 불안감의 뒤틀린 심층 심리를 보다 실감 나게 목소리로 표출하라는 극적 연기력을 성악가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맥베스가 오페라의 종반부에서 노래하는 아리아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 Pieta, rispetto, amore’는 특히 감동적이다. 그것은 ‘노년의 나에겐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 사라지고 오직 저주와 불행의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라는 비장한 토로이다.
오페라 <햄릿>, 파리 국립오페라 2022/23 시즌 공연 사진 ⓒElisa Haberer/OnP
방황하는 왕자보다 비련의 오필리어를 노래하다
앙브루아즈 토마, <햄릿(Hamlet)>
셰익스피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햄릿>은 수많은 작곡가가 오페라화에 도전했으나, 토마가 쓴 프랑스어 오페라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초연 때부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원작과 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결말이 특히 문제였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본 작가이기도 했던 당대의 명대본가 쥘 바르비에와 미셸 카레는 셰익스피어의 길고 복잡한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생략과 축약을 감행했고, 등장인물도 절반으로 줄였다. 결정적으로 피날레에서 햄릿이 죽지 않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되어 원작의 주제 의식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토마의 오페라는 낭만주의 문법에 충실하다. 즉, 복수와 도덕적 갈등 사이에서 방황하는 왕자 햄릿의 복잡한 심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햄릿과 그의 비련의 연인 오필리어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뤘다. 특히나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오필리어의 죽음’은 너무나 빛나는 명장면이다. 작곡가는 사랑을 잃고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채 차가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오필리어의 비극적 죽음을 무려 15분 길이의 장대한 ‘광란의 아리아(Mad Scene)’로 묘사하고 있다. 원작에선 오필리어의 죽음이 제3자의 설명 형식으로 묘사되지만, 오페라에서는 관객이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써 비극적 슬픔을 극대화하고 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극한의 기교를 총동원해 노래하는 이 장면은 그야말로 19세기 프랑스 오페라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비극의 클라이맥스라 할 것이다.
오페라 <오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2015/16 시즌 공연 사진 ⓒKen Howard/Metropolitan Opera
질투와 파멸의 심연에서 완성된 비극
주세페 베르디, <오텔로(Otello)>
<맥베스>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뒤. 베르디는 명실상부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70대의 나이였는데, 최후의 열정을 불살라 쓴 기념비적인 명작이 바로 <오텔로(Otello)>이다. ‘오텔로’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것인데, 당시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문화 운동을 주도하던 야심만만한 작가 아리고 보이토가 대본을 맡았다.
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진행되는 원작의 1막을 과감히 잘라 내고 키프로스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덕분에 오페라는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시종일관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으되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라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오텔로.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했던 우아한 귀부인 데스데모나의 비극이 원숙기 베르디의 놀랍도록 치밀한 음악과 시종일관 숨 막히는 호흡의 노래들로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오텔로>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혁명 선언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리아보다는 중창과 오케스트라가 작품의 중심에 서 있으며, 장면들끼리 유기적인 연속성을 지닌 점이 마치 바그너의 악극을 연상시킨다. 특히 4막에서 데스데모나가 부르는 두 개의 장대한 모놀로그, 즉 ‘버들의 노래’와 ‘아베마리아’는 이탈리아 오페라 예술의 위대한 전통과 베르디의 지칠 줄 모르는 처절한 작가정신이 만나 탄생한 위대한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오페라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 빈 국립 폭스오퍼 2023 시즌 공연 사진 ⓒBarbara Pálffy/Volksoper Wien
풍자와 웃음으로 풀어낸 유쾌한 희극
오토 니콜라이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Die lustigen Weiber von Windsor)>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립자로도 유명한 오토 니콜라이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 로마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감미로운 이탈리아식 벨칸토와 독일풍의 유려한 관현악이 조화를 이룬 오페라들을 발표해 큰 인기를 모았다. 그의 대표작은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인데,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 3막짜리 오페라다.
전쟁이 끝나고 윈저로 돌아온 존 폴스태프 경은 배 나오고 뚱뚱하며 변명 잘하고 떠벌리기 좋아하는 무일푼 술주정꾼이다. 그는 버젓이 남편이 있는 두 여자를 유혹하며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로 하지만, 어설픈 계획이 모두에게 탄로 나며 큰 망신을 당한다는 유쾌한 내용이다. 니콜라이는 달콤한 이탈리아식 아리아와 느긋한 민요풍의 음악을 조합해 관객들에게 넉넉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한편, 베르디 또한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팔스타프>라는 오페라를 썼다. 이 작품은 베르디가 남긴 마지막 오페라이기도 한데, 시종일관 유쾌하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도 인생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빛난다. 특히나 오페라 속 모든 등장인물이 무대 위로 나와 푸가로 돌림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앙상블 ‘세상만사는 그저 농담일 뿐이라오 Tutto nel mondo è burla’는 베르디의 음악적 유언처럼 느껴져 지금도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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